
사실 난 페이커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그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들 또는 청소년 내담자에게 흘려 들었던 정보가 전부였다.
그에 대해 흥미를 가진 것은 약 한 달 전 그가 2024 롤드컵 결승전에서 우승했다는 뉴스를 우연히 접하고 나서이다.
박진감 넘치는 롤드컵 경기 장면, 경기를 중계하는 각국의 아나운서들의 들뜬 설명, 경기장에 운집한 팬들의 환호 등을 보면서 롤이라는 게임이 지니는 문화적 위치를 비로소 인지하게 되었다.
팬들이 각자 그를 숭상하기 위해 만든 페이커 관련 영상, 밈, 용어 등은 그가 롤 팬 사이에서 얼마나 신격화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에 대한 여러 스토리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의 할머니였다.
페이커의 할머니는 그가 밤을 새워 게임을 할 때 그의 곁에서 잠도 자지 않은 채 그의 게임을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게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화면만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롤이라는 게임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페이커가 하는 게임 방식을 파악할 수 있었던 안목까지 지니고 계셨다.
PC 게임을 전혀 접하지 못했던 연세가 있는 할머니가 롤이라는 게임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할머니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페이커와 대화를 하고, 혼자서 많은 전략적 고민을 하셨을 것이라 짐작한다.
한국에서 어떤 청소년들은 그를 모델 삼아 프로스포츠 선수가 되려는 소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매우 운이 좋게도 자녀의 그러한 진로 선택을 적극 지지하고 경제적으로 후원까지하는 부모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페이커의 아버지, 할머니가 그들과 다른 점은 페이커를 비롯한 가족들이 그의 프로게이머로서 성공을 목표로 게임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순히 그를 사랑하고 수용하기에 그가 하는 것을 믿고 지켜보았다는 점이다.
십여 년 전 만났던 청소년이 생각난다.
그는 나름 이 지역에서 게임을 잘하던 청소년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주말이면 PC방에 가서 종일 있었다. 그의 부모는 그를 찾기 위해 동네 PC방을 온종일 찾아돌아다녔다. 그는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 본 그 학생의 쓸쓸한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한국은 외국의 성공한 인물들을 칭송하며 학생들이 그러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훌륭한 인물은 그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역량이 발휘될 문화적 조건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양성보다는 경제적 성공만이 인정되는 사회, 자율성보다는 획일적 교육과정을 잘 수행하는 학생을 좋은 학생으로 평가하는 교육관, 명문대를 가는 것이 지상과제인 사회에서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없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 페이커가 나온 것은 기적이다.
그의 성공은 전혀 한국적이지 않은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의 양육태도가 큰 역할을 했다. 보호자가 그런 수용적 태도를 지닌 것은 페이커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의 한국 사회의 주류적 가치관을 내면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세대 혹은 다음 세대에 페이커처럼 훌륭한 인물이 나오길 기대한다면 그의 성공을 축하하고 한국인이라는 동일시를 통한 자기만족에 빠지지 말고, 한국 사회의 문화적 장애를 극복한 그의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무엇이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 페이커와 같은 인물은 다시 나타나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